[피플] 와인 찾아 떠난 세계 여행, 배두환·엄정선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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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찾아 떠난 세계 여행 - 배두환·엄정선 부부

같은 꿈을 가진 두 사람이 만났다. 모든 것을 포기하더라도 이루고 싶은 한 가지를 향해 그들은 용감하게 발을 내딛었다.세계 각지의 와인을 만나기 위해 지구 한 바퀴를 돌고 온 배두환·엄정선 부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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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은 배두환·엄정선 부부에게 특별한 해였다. 결혼 6개월 차 신혼부부가 세계 14개국의 와인 산지를 여행하기까지는 30여 년의 시간과 수천 개의 와인 병 그리고 운명적인 만남이 필요했다. 여행은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꼭 물려 있던 일상의 톱니바퀴가 서서히 느슨해지는 동안, 두 사람은 전에 없던 감각이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입안에 머금은 와인에서 예상치 못한 맛을 발견한 것처럼 하루하루가 기쁨에 넘치는 순간이었다.


WEDDING21 어쩌다 와인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나.

배두환 원래 술에 관심이 많았다(웃음). 제대 후 막연히 칵테일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으로 학원을 찾아갔는데 칵테일과 커피, 와인을 함께 배우는 과정이 있었다. 그런데 엉뚱하게 와인에 꽂혀버린 거다. 다른 두 가지에 비해 와인은 끝이 보이지 않는 느낌이었다.그때 처음으로 와인과 관련된 직업을 가져도 재밌겠다는 생각을 했다.
엄정선 나는 술은 입에도 못 대는 사람이었다. 처음에는‘필요에 의해’와인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극작을 전공하고 시나리오작가교육원에 다니던 중 과제를 하나 받았는데, 시나리오 하나를 혼자 힘으로 완성하는 거였다. 당시 FTA 체결이 화제였고, 칠레에서 와인이 수입된다는 말에‘이거다!’싶었다.

와인을 주제로 시나리오를 쓰겠다고 결심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웃음). 가장 먼저 근처 와인 레스토랑에 찾아갔고, 와인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후 레스토랑 근무를 시작해 대기업 외식사업부에서 매니저 겸 소믈리에로 일했다.

배두환 학교를 졸업하고 오픈을 준비하던 와인숍에 초창기 멤버로 들어가게 됐다. 당시 전국에서 제일 큰 창고형 와인 아울렛이었는데, 와인 종류만 수백 가지였다. 거기서 2년 일하는 동안 와인의 기본기를 쌓았다. 그 후 <와인리뷰>에 입사해 2014년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와인 전문 기자로 일했다.

엄정선 솔직히 와인을 좀 알면 글이 술술 써질 거라고 생각했다(웃음). 그런데 아직도 집필 중이다. 등장인물의 성격을 모두 와인의 특성에서 가져왔기 때문에 인물을 완벽히 이해하려면 와인이 만들어진 배경을 공부해야 했다. 매장에서 경험하는 와인으로는 부족했다.

결국 대학원에서 양조학을 전공하게 됐고, 거기서 남편을 만났다. 그래서 아직도‘선배’라고 부르는 게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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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 배두환·엄정선 부부가 일하는‘비노 안토니오’. 낮에는 카페, 밤에는 와인바로 운영된다.
우 : 부부에게 의미 있는 와인 중 하나인‘샤또 까브리에르’. 여행 중 이 와인을 만드는 와이너리에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WEDDING21 와인으로 하는 세계 여행은 언제, 어떻게 계획했나.
엄정선 어릴 적부터 반드시 세계 여행을 가겠노라 다짐했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주변 사람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데이트 중“나는 결혼하고 세계 여행을 떠날 거야.”라고 속내를 비췄더니 남편이 반색을 하는 거다. 둘이서 세계의 와이너리를 여행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고, 그 자리에서 결혼을 결정했다.

배두환 일요일 저녁에 그 이야기를 나누고, 다음 날 은행 앞에서 만났다. 목표를 2년으로 잡아 공동 명의의 적금통장을 두 개 만들었다. 여행자금과 결혼자금.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황당할지도 모르나 우리에게는 절실한 꿈이었다. 와이너리 투어는 모든 와인 애호가의 꿈이기도 하다.

엄정선 통장을 만들기 전에는 데이트하면서 가끔씩 좋은 레스토랑에도 가고 비싼 공연도 봤는데, 그런 걸 죄다 포기했다. 고급 레스토랑이 아니어도 저렴하고 맛있는 식당이 많았고, 무료 전시도 열심히 찾아 다녔다. 같은 목표가 있으니까 그런 것도 다 재미있게 느껴졌다.

월급만 모아서는 턱없었을 텐데 퇴직금을 합치고 자취방 보증금까지 더하니 목표액에 도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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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 비노 안토니오의 내부. 아늑한 분위기에서 편안하게 와인을 마실 수 있다.
우 : 요즘은 함께 운영하는 와인 바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WEDDING21 보통은 결혼 전에 돈을 모아 집을 산다. 부모님이나 지인들의 반응은 어땠나.

배두환 우리 두 사람은 평균보다 빨리 독립한 편이다. 결혼을 준비하면서도 부모님께 전혀 손 벌리지 않았다. 우리 힘으로 결혼식을 올리면서 부모님을 초청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가 모은 돈은 집을 구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액수였다(웃음).

보통 해외여행을 가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1년 동안 세계를 여행하며 쓴 돈을 전부 합해봐야 6000만 원이 조금 넘는다.

엄정선 나 역시 대학을 졸업하면서부터는 혼자 힘으로 모든 걸 결정해왔다. 부모님도 늘 내 결정을 지지해주셨다. 그런데 이번 결정을 인정해주신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계속 와인 일을 해왔기 때문일 거다. 그냥 놀러가는 게 아니라고 이해하신 듯하다.

배두환 비슷한 사람끼리 만난 게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정말 감사하게도 우리가 세계를 돌아다니는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생기거나 가까운 누군가가 아팠다면 그 길로 여행을 접고 돌아와야 했을 것이다. 1년 동안 그런 일이 없었을 뿐더러, 가족은 물론 친구들도 진심으로 응원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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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 자연경관이 특히 아름다웠던 뉴질랜드 남섬‘센트럴 오타고’.
우 : 다양한 와인들이 잠들어 있는 스페인 아로마을 로다 와이너리의 와인 동굴.

WEDDING21 1년간 14개국을 여행했다. 두 사람의 여행 방식은 어떤가.

배두환 전 세계 와인 생산국을 둘러보는 여정이었다. 호주에서 시작해 세계 3대 와인 생산국인 프랑스와 이탈리아, 스페인을 포함한 14개국을 돌아다녔다. 1년간 방문한 와이너리가 280곳 이상 된다. 호흡이 긴 여행이라 중간에 쉬어간다는 의미로 각자 가보고 싶은 나라를 한 군데씩 넣었다. 나는 크로아티아, 아내는 영국이었다.

엄정선 우리 일정은 단순했다. 보통 하루 3~4곳. 이동 거리가 길면 한두 군데의 와이너리만 방문했다. 와이너리 투어가 끝나면 마트에 들러 장을 본 후 숙소에서 저녁을 만들어 먹었다. 외식을 하지 않은 것도 여행 경비를 줄일 수 있었던 비결이다.

숙소 역시 관광지에서 한참 떨어진 외곽에 잡아서 저렴했다. 잠들기 전에는 다음 날 방문할 와이너리를 찾아 예약하고 하루 동선을 짰다. 이런 식으로 1년을 다니다 보니 여행 일정을 짜는데 도가 텄다.

배두환 처음에는 일정을 과하게 짰다. 그토록 오고 싶었던 여행인데, 얼마나 의욕이 넘쳤겠는가. 3일째 되던 날, 문득 일정을 종이에 적어보니 30분 단위로 움직이고 있더라. 순간‘이게 뭐지?’싶었다. 여기까지 와서 한국에서처럼 생활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 후로 투어는 무조건 오후에 끝내고 저녁에는 숙소에서 휴식을 취했다. 이건 장거리 마라톤이라고 우리 스스로를 설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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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생떼밀리옹마을. 와이너리를 둘러싼 끝없는 포도밭이 장관이었다.


WEDDING21 여행 중 기억에 남는 장소나 에피소드가 있다면.

배두환 아무래도 첫 여행지였던 호주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와이너리 투어를 한 뒤 특별한 초대를 받게 된 것. 우리가 양조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와인을 공부하기 위해 여행을 왔다는 걸 기특하게 여긴 주인의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근사한 저택에 머물렀을 뿐 아니라 다음 날 아침 7시부터 저녁 8시까지 와이너리의 모든 작업을 한 시간 단위로 체험해볼 수 있었다. 저녁에는 기가 막히게 맛있는 캥거루 요리까지 대접받았다.

엄정선 기억에 남는 와이너리로는 옐로 와인‘뱅존’로 유명한‘도멘 퓌프니’를 꼽고 싶다. 3대 뱅존 와이너리 중 하나로 우리가 방문했을 당시인 2014년은 자크 퓌프니가 은퇴를 결정한 해였다.

실제로 만나보니 그는 굉장히 소박한 노인이었다. 노환으로 다리를 절룩이면서 와이너리를 구경시켜줬는데, 자신이 만든 와인을 맛보는 우리 표정을 주의 깊게 살펴보며 행복해했다.

배두환 여행 중간에 각자 가고 싶은 국가를 넣었던 게 신의 한 수였다. 잠시 동안 와인을 잊을 수 있었던 크로아티아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지냈다. 인적 드문 바닷가에 위치한 숙소에서는 거의 속옷 차림이었다(웃음). 눈을 뜨면 바다로 나가서 수영을 하고 조개를 잡아 구워 먹기도 했다.

특히 여행지에서 봤던 자연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남아공 케이프타운에서는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에 올라 석양을 바라봤는데,‘ 압도된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알 수 있었다. 미친 듯이 사진을 찍었지만,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그 풍경을 담아낼 수는 없었다.

엄정선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도 잊을 수 없다. 주로 에어비앤비를 이용했기 때문에 다른사람들과 한집에서 자연스럽게 어울려 지냈다. 같이 음식을 나눠 먹고, 밤이 되면 정원에 모여 수다를 떨었다. 외국인들이 정이 없다는건 편견이다. 영국에서는 슬로바키아, 프랑스,영국인 친구들과 한달동안 집을 나눠썼는데 헤어질 때는 서운해서 눈물이 났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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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쿠지노 마쿨 와이너리에서 느긋하게 와인을 즐기는 모습.


WEDDING21 결혼 생활 절반을 여행지에서 보냈다. 두 사람에게 여행은 어떤 의미인가.

배두환 사실 부부들이 함께 보내는 시간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퇴근하고 잠들기 전에 잠깐 얼굴을 보거나, 주말에 함께하는 정도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여행은 완전히 다르다.365일 24시간을 한 몸처럼 붙어 다닌다. 싸워도 금방 화해하고 풀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행이 불가능하다.

엄정선 확실한 역할 분담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줬다. 예를 들어 남편이 운전을 하면 나는 옆에서 지도를 본다. 여행 일정을 짤 때 역시 나는 항공권과 숙소, 남편은 와이너리 선정과 예약을 담당했다.“ 내일은 일정이 어떻게 돼?”,“ 숙소 예약했어?”이런 이야기를 수시로 나누는데 어떻게 싸울 수가 있겠나.

여행이 끝날 때쯤, 문득 우리가 완벽한 파트너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두환 서로 취약한 점과 장점을 속속들이 알게 됐다. 사업을 하더라도 이렇게 손발이 맞는 직원을 구하는 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한국에 들어와서도 여행지에서처럼 각자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부분을 맡아 군말 없이 해낸다. 보통 부부들이 결혼 생활을 시작할 때 가정에서의 역할 분담 문제로 많이 다투곤 하는데, 우리는 여행지에서 이 부분을 완벽하게 해결했다.

엄정선 지금 운영하는 와인바도 원래 같이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데 나 혼자 감당하기 엔 버거운 부분이 있어 남편이 자주 들러 도와주다 보니 자연스럽게 함께하는 일이 됐다. 여기서도 역할 분담이 확실하다. 내가 와인과 서빙을 맡고, 남편은 요리를 책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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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 자크 퓌프니와 한 컷. 와인 애호가들에게는 신이나 다름없는 인물이다.
우 : 샤또 까브리에르 와이너리의 오너 부부와 함께.


WEDDING21 두 사람이 꿈꾸는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
배두환 한국에 들어와 가장 먼저 한 일이 구직 사이트에 이력서를 등록하는 거였다. 얼른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아내가“무리해서 일을 구하지 말고 올해까지는 느긋하게 지내자”며 말렸다. 이건 정말 놀라운 변화다. 여행을 떠나기 전 아내는 심각한 일 중독자였다.

엄정선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직업인의 전형이었다(웃음). 적은 보상과 자기희생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 아마 여행을 다녀오지 않았다면 평생 그렇게 살았을 거다. 우리가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은 행복의 기준이 달랐다. 다른 사람의 기준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기준에 따라 저마다의 속도로 살아간다.

특히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소중히 여긴다. 남편이 지금 하는 작업을 마무리할 때까지만이라도 함께 일하고 싶은 마음이다.

배두환 지금 아내와 함께 프랑스 와인에 대한 책을 쓰고 있다. 올해 안에 우리의 여행 이야기를 다룬 책도 나올 예정이다. 낮에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밤에는 와인바를 운영한다. 바쁘게 살고 있지만 마음은 느긋하다.

엄정선 우리가 지난 1년 동안 멈춰 있었다면 한국에 돌아오는 게 불안했을 거다. 하지만 우리의 여행은 한국에서 경험할 수 없는 와인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후진이 아니라 전진을 했다는 자신감이 있다. 최소한 강의에 쓰일 사진 자료라도 확보하지 않았나(웃음).생각해보면 여행지에서의 매일이 그랬다. 애쓰지 않아도 인생은 어떻게든 흘러간다.


에디터 서지연 포토그래퍼 노현우
<웨딩21> 2015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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